세가지 꿈을 따라간 15년 인생살이
say something 2011. 11. 14. 07:5596년 대학을 학사로 졸업할 때, 다른 사람들은 한참 사진을 찍고, 아는 사람들과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있을 즈음, 똑같이 행복했어야 할 나는 그러지 못했다. 마침 어렵게 회사에, 그것도 당시에 대기업이라고 속하는 회사에 들어갈 수 있게 되었음에도 나의 마음 한구속은 한참 검은 먹구름으로 뒤덮혀 있었으며, 당시 어머니의 애원에 겨우 한, 두장 사진만 찍고 졸업장을 빠져 나왔다. 대학을 입학하자마자 갑자기 가정형편이 어려워 졌고, 급기야 대학교 3학년때 아버님이 돌아가셔서, 집안은 겨우 친지들 도움으로 방한켠과 나의 졸업때까지의 등록금만 남았었다. 고등학교때까지 부족함 없이 철부지로 자라서 그런지, 그런 환경속에서도 마침 대학교 4학년에 되서야 학업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경제사정때문에 대학원을 가지 못하게 된것이 못 내 아쉬웠다. 치기 어린 마음에서 일까? 결국 현실에 굴복하게 되었을때 오기로 라도 세가지는 꼭 해보자란 생각이 들었고, 어쩌면 어려운 현실에 대한 부정이었을지도 모르겠다.
대학교를 졸업할때 나의 세가지 꿈은,
첫째, 해외여행을 많이 해보는 것 - 대학다닐때 일본을 여행해 보는게 꿈이었고, 고등학교때 시절부터 일본 배낭여행에 대한 세미나 (당시, 이규형의 배낭여행이란 제목으로 부산에서 세미나 같은 것 했었는데, 그때 그 이야기를 듣고, 대학만 가면, 바로 일본으로 여행을 할 수 있게 될 줄 알았다.)
둘째, 무조건 대학원을 졸업하기.
세째, 해외에서 살아 보기. (뭐 누구나 막연히 이런 꿈을 가질 수 있으나, 나의 경우는 초 중 고등학교 때마다 매년 부모님이 미국으로 이민 갈 것 같은 이야기를 자주 하셔서, 그걸 해보지 못한 것에 대한 아쉬움에 생긴 꿈이 아닐까 생각한다. 실제로, 미국에 많은 친척분들이 계시고, 어쩌면 기회가 되면, 미국 이민을 갈 계획도 있었으나, 매번 그 계획은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첫번째 꿈은 그리 어렵지 않게 해결 되었다. 직장 생활을 시작하자, 학생때와는 다르게 경제적 여유가 생겼고, 나는 기회가 될때마다, 일본, 홍콩, 마카오, 라오스, 캄보디아, 태국, 싱가폴 등등을 전전하며 여름휴가를 보냈다. 처음 홍콩을 여행한다고 했을때가 98년이었는데, 직장내 다른 사람들은 이해를 하지 못했다. 왜 출장이 아닌 다른 이유로 해외로 나가려 하는지, 아마 해외여행이란 아직 그렇게 익숙하지 않았을때 여서 더욱 그랬던것 같다. 그렇게 '앙코르 왓'과 '보르부드르 사원'등을 내 눈으로 보고 느꼈을때, 나는 여행이란 나의 꿈에 만취되어 있었다.
두번째 꿈은 몇가지 시도와 타협이 있었다. 첫 직장을 3년 8개월 정도 하고 났을때, 나는 다시 학교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큰 돈은 아니지만 이리저리 저축한 것을 더하면, 어찌저찌하면 2년 공부를 할 동안 먹고 살 정도 되는 것 같았다. 그래서 몇군데의 대학원에 지원도 하고, 때마침, 한국항공우주산업에서 전문 계약직 엔지니어를 모집하길래, 그쪽에도 지원을 했었다. 나의 학부는 항공우주공학으로 한국항공우주산업에 입사하면 항공엔지니어로의 커리어를 시작하기에도 좋을 것 같았다. 우여곡절 끝에 마침내 가장 일찍 연락이 온 항공우주산업으로 이직을 하고, 항공 엔지니어로의 경험을 쌓기 시작하였다.
첫 직장은 대우정밀 이라는 대우계열사 였고, 항공우주산업은 삼성에서 마침 떨어져 나온 삼성계 회사였으니, 그래도 우리나라에 이름있는 회사를 두군데를 다녔었는데, 개인적으로 참 실망을 많이 한 것 같다. 물론, 일반적으로 급여나 복지 측면에서는 평균보다 훨씬 우위에 있는 두 회사였지만, 내가 생각하는 기업문화하고는 많이 달랐고, 외국에 기업문화는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였다. 이런저런 생각중에 혹시나 유학이 어떨까 고민하고 있을때쯤, 아는 친구로 부터 캐나다 이민에 대한 정보를 알기 시작했고, 부족한 유학경비대신 이민자로 캐나다를 가는 것이 많은 메리트가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들어 여러가지 정보를 모았다. 한국에 계실 모친이 걱정이 되기는 했으나, 아직 결혼도 하지 않은 지금 이런 모험을 하지 않으면, 다시 기회가 없을 것 같아, 캐나다로 이만할 계획을 세웠고, 이로써 세번째 꿈까지 이룰 수 있었다.
결국, 04년 겨울, 나는 캐나다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결정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대학원 서류는 여러 캐나다 대학에 이미 제출해 놓았으나, 지원만 하고, 일단 나는 캐나다에 가서 살 예정이니 캐나다로 갔다. 거기서 몇개월 있으면서, 영어공부도 하고, 캐나다의 컬리지나 여러가지 가능성을 알아 보고 있었다. 다행히, 캐나다의 한 대학원에서 연락이 와서, 입학하게 되었고, 그리하여 두번째와 세번째 꿈은 이루어 졌다. 캐나다에 이민자로 살면서 학교에서 대학원 석사 공부를 시작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07년 가을 나는 캐나다의 칼튼대학원에서 석사로 졸업을 하는 동시에... 백수가 되었다. ㅠㅠ. 당시, 나는 내가 세웠던 세가지 꿈들이 다 성취되었음에 만족함에도, 다시 한국으로 돌아가 취업을 하기에는 내가 이미 캐나다에 투자한 시간이, 노력이 혹시나 캐나다에서 일자리를 얻는데 도약대가 되지 않을까 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기왕 여기까지 온거 외국의 회사에서 일한 경력을 만드는 것이 보너스 꿈이 되어 버렸다. 실은, 처음부터 나의 생각은 외국의 기업에 엔지니어로 일하는 것일지도 모르겟다. 위의 세가지 꿈은 결국 마지막 보너스 꿈을 실현하기 위한 과정이었다. 그렇게 미친듯 여름휴가때마다 혼자 해외를 쏘다녔던 건, 외국의 어려운 환경에 있을때를 대비한 훈련이 아니었을까? 두번째, 세번째꿈은 해외취업을 위한 선수과정이나 마찬가지 였던것 같다.
그리하여, 1년여년의 취업을 향한 노력은 08년 캐나다의 한 조그만 항공회사에 취직이 되면서 이룰수 있었다. 그리고, 11년, 그 회사에서 레이오프 됨과 거의 동시에 Bombardier Aerospace 라는 Boeing과 Airbus에 이어 세계 항공기 생산회사 3위의 회사에 입사하면서, 나의 15년 꿈의 인생은 안착할 수 있었다.
요즘엔 많은 사람들이 현실을 직시하라고 말한다. 물론,아주 공감하는 말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꿈까지 버릴 필요는 없을 것 같다. 내가 꿈을 버리고, 현실만 바라봤다면, 취업때 양복한벌 없어서 친구한테 빌려 입었던 사람이, 세계 3대 항공회사의 엔지니어는 될 수 없었을 것 같다. 나는 내가 특별히 공부를 잘하다건가, 훌륭한 엔지니어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단지, 내가 있는 자리에서, 무엇이 항상 최선이고, 내가 어떤 선택을 할 수 있는지를 늘 고민했던 것 같다.
현재의 나는, 아직도, 내일 어떻게 될 지 모르는 한사람의 엔지니어일 뿐이지만, 자신의 꿈은 자신의 힘과 노력에 의해 성취된다고 믿는 많은 사람들 중에 하나이다. 심지어 입에 금수저를 물고 태어난 사람이 비웃을 지라도.. So what, I don't care.
대학교를 졸업할때 나의 세가지 꿈은,
첫째, 해외여행을 많이 해보는 것 - 대학다닐때 일본을 여행해 보는게 꿈이었고, 고등학교때 시절부터 일본 배낭여행에 대한 세미나 (당시, 이규형의 배낭여행이란 제목으로 부산에서 세미나 같은 것 했었는데, 그때 그 이야기를 듣고, 대학만 가면, 바로 일본으로 여행을 할 수 있게 될 줄 알았다.)
둘째, 무조건 대학원을 졸업하기.
세째, 해외에서 살아 보기. (뭐 누구나 막연히 이런 꿈을 가질 수 있으나, 나의 경우는 초 중 고등학교 때마다 매년 부모님이 미국으로 이민 갈 것 같은 이야기를 자주 하셔서, 그걸 해보지 못한 것에 대한 아쉬움에 생긴 꿈이 아닐까 생각한다. 실제로, 미국에 많은 친척분들이 계시고, 어쩌면 기회가 되면, 미국 이민을 갈 계획도 있었으나, 매번 그 계획은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첫번째 꿈은 그리 어렵지 않게 해결 되었다. 직장 생활을 시작하자, 학생때와는 다르게 경제적 여유가 생겼고, 나는 기회가 될때마다, 일본, 홍콩, 마카오, 라오스, 캄보디아, 태국, 싱가폴 등등을 전전하며 여름휴가를 보냈다. 처음 홍콩을 여행한다고 했을때가 98년이었는데, 직장내 다른 사람들은 이해를 하지 못했다. 왜 출장이 아닌 다른 이유로 해외로 나가려 하는지, 아마 해외여행이란 아직 그렇게 익숙하지 않았을때 여서 더욱 그랬던것 같다. 그렇게 '앙코르 왓'과 '보르부드르 사원'등을 내 눈으로 보고 느꼈을때, 나는 여행이란 나의 꿈에 만취되어 있었다.
두번째 꿈은 몇가지 시도와 타협이 있었다. 첫 직장을 3년 8개월 정도 하고 났을때, 나는 다시 학교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큰 돈은 아니지만 이리저리 저축한 것을 더하면, 어찌저찌하면 2년 공부를 할 동안 먹고 살 정도 되는 것 같았다. 그래서 몇군데의 대학원에 지원도 하고, 때마침, 한국항공우주산업에서 전문 계약직 엔지니어를 모집하길래, 그쪽에도 지원을 했었다. 나의 학부는 항공우주공학으로 한국항공우주산업에 입사하면 항공엔지니어로의 커리어를 시작하기에도 좋을 것 같았다. 우여곡절 끝에 마침내 가장 일찍 연락이 온 항공우주산업으로 이직을 하고, 항공 엔지니어로의 경험을 쌓기 시작하였다.
첫 직장은 대우정밀 이라는 대우계열사 였고, 항공우주산업은 삼성에서 마침 떨어져 나온 삼성계 회사였으니, 그래도 우리나라에 이름있는 회사를 두군데를 다녔었는데, 개인적으로 참 실망을 많이 한 것 같다. 물론, 일반적으로 급여나 복지 측면에서는 평균보다 훨씬 우위에 있는 두 회사였지만, 내가 생각하는 기업문화하고는 많이 달랐고, 외국에 기업문화는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였다. 이런저런 생각중에 혹시나 유학이 어떨까 고민하고 있을때쯤, 아는 친구로 부터 캐나다 이민에 대한 정보를 알기 시작했고, 부족한 유학경비대신 이민자로 캐나다를 가는 것이 많은 메리트가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들어 여러가지 정보를 모았다. 한국에 계실 모친이 걱정이 되기는 했으나, 아직 결혼도 하지 않은 지금 이런 모험을 하지 않으면, 다시 기회가 없을 것 같아, 캐나다로 이만할 계획을 세웠고, 이로써 세번째 꿈까지 이룰 수 있었다.
결국, 04년 겨울, 나는 캐나다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결정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대학원 서류는 여러 캐나다 대학에 이미 제출해 놓았으나, 지원만 하고, 일단 나는 캐나다에 가서 살 예정이니 캐나다로 갔다. 거기서 몇개월 있으면서, 영어공부도 하고, 캐나다의 컬리지나 여러가지 가능성을 알아 보고 있었다. 다행히, 캐나다의 한 대학원에서 연락이 와서, 입학하게 되었고, 그리하여 두번째와 세번째 꿈은 이루어 졌다. 캐나다에 이민자로 살면서 학교에서 대학원 석사 공부를 시작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07년 가을 나는 캐나다의 칼튼대학원에서 석사로 졸업을 하는 동시에... 백수가 되었다. ㅠㅠ. 당시, 나는 내가 세웠던 세가지 꿈들이 다 성취되었음에 만족함에도, 다시 한국으로 돌아가 취업을 하기에는 내가 이미 캐나다에 투자한 시간이, 노력이 혹시나 캐나다에서 일자리를 얻는데 도약대가 되지 않을까 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기왕 여기까지 온거 외국의 회사에서 일한 경력을 만드는 것이 보너스 꿈이 되어 버렸다. 실은, 처음부터 나의 생각은 외국의 기업에 엔지니어로 일하는 것일지도 모르겟다. 위의 세가지 꿈은 결국 마지막 보너스 꿈을 실현하기 위한 과정이었다. 그렇게 미친듯 여름휴가때마다 혼자 해외를 쏘다녔던 건, 외국의 어려운 환경에 있을때를 대비한 훈련이 아니었을까? 두번째, 세번째꿈은 해외취업을 위한 선수과정이나 마찬가지 였던것 같다.
그리하여, 1년여년의 취업을 향한 노력은 08년 캐나다의 한 조그만 항공회사에 취직이 되면서 이룰수 있었다. 그리고, 11년, 그 회사에서 레이오프 됨과 거의 동시에 Bombardier Aerospace 라는 Boeing과 Airbus에 이어 세계 항공기 생산회사 3위의 회사에 입사하면서, 나의 15년 꿈의 인생은 안착할 수 있었다.
요즘엔 많은 사람들이 현실을 직시하라고 말한다. 물론,아주 공감하는 말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꿈까지 버릴 필요는 없을 것 같다. 내가 꿈을 버리고, 현실만 바라봤다면, 취업때 양복한벌 없어서 친구한테 빌려 입었던 사람이, 세계 3대 항공회사의 엔지니어는 될 수 없었을 것 같다. 나는 내가 특별히 공부를 잘하다건가, 훌륭한 엔지니어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단지, 내가 있는 자리에서, 무엇이 항상 최선이고, 내가 어떤 선택을 할 수 있는지를 늘 고민했던 것 같다.
현재의 나는, 아직도, 내일 어떻게 될 지 모르는 한사람의 엔지니어일 뿐이지만, 자신의 꿈은 자신의 힘과 노력에 의해 성취된다고 믿는 많은 사람들 중에 하나이다. 심지어 입에 금수저를 물고 태어난 사람이 비웃을 지라도.. So what, I don't car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