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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adget 2011. 10. 21. 11:48
캐나다만 그런건지, 로저스라서 그런건지, 가격이 199인데 Mail-in rebate로 50불을 신청하면 다음 Bill에서 깍아
준다고 하네요(결국 149불). 2년 6개월 이하는 30불 패널티 내야 하구요. 택스등 이것저것 다해서 300불이 조금
넘더군요. 당연히, 3년 컨트랙이구요. (캐나다 니까요..ㅎㅎㅎ).
씨리도 잠깐 써 봤는데, Map and direction은 미국만 되더군요. "Where am I" 하면, 자기는 캐나다 맵을
불러올 수 없다. 뭐 이런 내용만 나오네요. 제가 발음이 안좋은지 인식률은 그리 높지 않더군요. ㅠㅠ (그래도 개인적인 생각으로
이정도는 되야지 하는 것 보다는 훨씬 잘 되는 것 같습니다.)
업데이트는 restore itune 뭐라고 써 있는거 누르니깐 자동으로 되고, 받자 마자 바로 개통되고, 전에 쓰던 폰은 바로 Deactivate 되더군요.
근데 핵심은 '와이프 꺼라는' ㅠㅠ 그동안 3G로 인내심을 시험하더니.. 아이폰 노래를 부르더군요.
화이트인데 생각보다 보기는 괜찮더군요. 액정이 약간 노랗다고 하는 경우도 있던데, 제가 보기엔 잘 모르겠더군요.
say something 2011. 10. 12. 11:45
갑자기 좋은 직장이란 어떤 정의를 가지고 있을까? 란 궁금증이 들었다. 물론, 돈을 많이 주는 회사가 좋은 회사일수도 있지만, 절대적인 기준이 되는 건 아닐거란 생각이 든다. 얼마전에 회사에서 같은 팀원이 자기 생일이라고 하길래 몇살이냐고 물었더니, 23살이란다. 사실 많이 놀랐다. 얼마전에 여러 엔지니어들 앞에서 자기가 맡은 일 프리젠테이션도 하고 하길래, 그래도 경력도 좀 많이 있는 친구일 줄 알았는데...
같은 팀원들 중에 23, 25살 된 친구들이 몇명 있다. 또한, 얼핏 보기에도 50이 넘은 엔지니어들도 많다. 우리 팀이 20-30명인데 나이도 들쭉날쭉이고, 200명 정도 되는 우리 부서를 봤을때도 참 다양한 연령대의 사람들이 일하는 것 같다.
사뭇, 한국의 직장 분위기와 참 많이 다른것 같다. 한국의 경우, 우수한 젊은 인력이 많은 다양한 아이디어롤 표출하려 해도, 나이가 적다는 이유만으로 의견이 무시되는 경우가 많았던 것 같다. 물론, 엔지니어링의 경우, 어느 정도 경험도 있어야 하고, 실수도 많이 해봐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러한 제한들이 일을 제대로 못하게 되는 기준이 되지는 않는다. 그래서, 경험 많은 Senior engineer들이 팀 전체를 리드하고, 어려운 사항들이 있을때 항상 거리낌 없이 물어보고, 설명해 주고 그러는 걸 봤을때 참 솔직하게 일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한국의 경우도 그러한 분들도 많았지만, 어떤 분은 자기가 가진 노하우가 무슨 자기 밥그릇인양, 남에게 절대 알려주지 않으려고 그러는 분들 또한 적지 않았던 것 같다. 캐나다로 그런 사람들이 있겠지만, 그렇게 유별난 사람들은 적게 보이는 것 같았다.
좋은 직장이란
1) 연공서열보다는 나이에 관계없이 수평적인 관계가 지속될 수 있는 팀원
2) 각 분야가 전문화 되어 있어서, 자신만의 업무에 집중할 수 있는 조직
3) 각 개인이 희생이 되어야 하는게 아니라, 자발적으로 일에 몰두 할수 있는 환경
4) 직원의 미래에 관심을 가져주는 회사
등등이 아닐까 하는 개인적인 생각이 들었다.
사람마다 다 기준이 다르기 때문에, 반드시 어떤 요소가 중요한지는 개인의 판단에 의해서 달라질 것이다.
단지, 내가 경험하기에 저런 조건들이 충족되는 회사라면 어느한 사람이 가서 일하더라도 좀더 의욕적, 창조적으로 일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say something 2011. 10. 6. 10:46
오늘 자주가는 커뮤니티에 "스펙"이란 단어가 반복적으로 많이 나오길래 아쉬운 마음에 글을 적는다. 스펙.. SPEC 는 specification (사양)이란 의미로 쓰이며 주로 하드웨어의 성능비교를 위하여 사용되는데, 오랜 테스트 엔지니어로 때로는 spec을 만들어 제출하는 경우도 있고, 또 어떤 때는 맞는 스펙에 관한 장비를 써치하여 구매한 적도 여러번이다.
오늘날 한국에서는 약간 다른 의미로 사용되는 듯하다. 어떤 사람의 학점, 언어실력 및 자격증, 유학경력등을 통털어 일컫는 말로, 예전에 어딘가에서 "네 스펙에 잠이 오냐?"란 말을 듯고 "풋"하고 웃으며 참 누가 저런 구절을 만들어 냈는지 참 대단하다 라고 웃으며 넘겼던 기억이 난다.
이제는 아예 신문기사는 물론이고 일상용어가 된 "스펙". 언제부턴가 식상하고 '어떻게 기계에나 붙이는 단어를 사람에게 쓰게 되었을까'하는 의구심이 가시질 않는다.
어쩌면, 나에게는 이런 '스펙'을 사람에게 쓰는게 요즘은 아니고, 한 참 전으로 거슬러 올라 가는 것 같다. 한 10여년 전이었나? 당시, 해외유학에 관심이 있던 터라, 여기저기 유학관련 커뮤니티를 두루 섭렵하고 있을때 쯤, '저는 이번에 보스턴 대학에 입학하게 된 아무개입니다. 저의 스펙은 xxxx' 이라고 하며, 자신의 학점과, 토플, GRE점수를 공개하던 사람들이 있었다. 수백개의 대학이 있는 미국의 대학지원에서 무한정 지원할 수 없으니, 저런 가이드라인이 있으면, 자신이 지원할 학교수준을 대충 책정할 수 있어서 정말 고마운 정보가 아닐 수 없었다. 스펙을 공개하는 분들도 자신도 필요할때 저런 스펙을 보고 많은 힘들 얻었기에, 누군가에게 약간 이라도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어서 공개했을 거란 생각이 든다. 이때의 스펙이 지금의 한국에서 일컫는 스펙으로 진화했는지는 잘 모로겠으나, 아주 무관하지는 않을 듯 싶다.
어떤 사람은 이런 방법으로 정형화, 표준화하여 구분하는게 더 편리하다는 논리를 내 세울수도 있을것 같다. 하지만, 우리는 사람이고, 어느 두사람도 똑같지 않다. 그럼에도 이런 획일적인 구분이 필요한 것 일까? 부모 잘 만나서 자가용 끌고 등하교하며 여유있게 공부해서 받은 3.0이란 학점이, 매일 아르바이트에 방학때는 공장가서 힘겹게 일하며 3.0을 받고 졸업한 사람과 같은 똑같이 구분되어야 하는가? 취업이 안되서 대학원 간 사람과 정말 공부가 하고 싶어서 10년간 자신이 모은 돈으로 겨우겨우 대학원 공부를 마친 사람은 같은 석사라는 학위로만 인정되는 것일까? 해외 나와서 한국 술집만 돌아 다니는 유학생과 눈물 콧물 흘리며 밤새며 공부했던 유학생은 그냥 유학생이란 타이틀외엔 차이가 없는 것일까?
이제 제발 시대가 어떻고, 사회가 저떻고 하며 핑계대는 일은 그만했으면 한다. 20년 전에도 똑같이 그랬고, 10년 전에도 늘 같은 상황인데, 늘 자신의 책임은 없고 바깥으로 책임을 넘기기만 하려 한다.
요즘은 꿈꾸는 젋은 사람들이 참 드문것 같다. 그냥 대충 공무원이나 해서 살지 뭐. 하긴 20년 전에도 '짧고 굵게' 보다는 '가늘고 오래'가 더 선호되었으니 안정적인 삶을 추구하는 것은 어느 시대나 마찬가지인 모양이다. 그렇다고, 자신이 가신 꿈 마저 날려버릴 필요는 없지 않을까? 꿈 꾸고, 그 꿈을 어떻게 하나 둘 실천해 나아가는냐 하는 것이 자신이 얼마나 알찬 삶을 꾸려나가느냐의 바로메터가 아닐까?
say something 2011. 9. 21. 12:48
한국 나이론 이제 마흔, 여기 나이론 좀 남긴 했지만... 하여간, 오늘 문득 생각난 김에 늦은 시간이라도 까먹기 전에 남긴다. 오늘 아침 문득 지금이 나의 삶의 정점이 아닐까 란 생각이 들었다. 이것만은 꼭 하고 싶다고 작정한 3가지가 1) 대학원 2) 해외에 살아보기 3) 해외여행하기 였다. 어느덧 3가지가 나 나름대로 만족할만큼 충족되었고, 거기다 덤으로 정말 다니고 싶은 해외의 유명 항공회사에 석달전부터 다니게 되었다.
그리고, 이것저것 하느라 한참이나 늦어졌지만, 와이프도 얻고, 얼마전에는 첫 딸의 출산으로 남들 다하는 것들 마저 다 하게 되는것 같다.
돌이켜보면, 참 긴 시간인것 같다. 남들이 한창때라고 말하는 서른 중반에 캐나다로 넘어와 늦깍이 대학원생에, 졸업하자 거의 1년간 취업시장만 바라 보고 있을때는, 여기까지가 나의 한계인가 하는 생각도 많이 들었다. 정말, 마지막이라고 생각하는 순간에, 조그마한 항공업체에 취직하게 되었고, 두 해가 지나며, 발전가능성이 낮아 보일때, 내가 이것 때문에 그 고생을 하며 지나온 건가 하는 자괴감도 들었다. 마지막에 레이오프라는 통보를 받은 후, 이제 어찌해야 하나 하는 고민과 절망의 순간에, 지금 다니는 회사에 연락이 왔고, 30분 정도의 전화인터뷰 후, 가능성이 별루 없을 거라고 생각했음에도 불구하고, 오퍼를 받을 수 있었다.
19살에 나는 항공업이 앞으로 크게 성장할거란 막연한 기대감으로 전공을 선택하게 되었고, 그 선택이 틀리지 않았음을 증명하기 위해, 나머지 20년을 살아온것 같은 느낌이 든다. 한국의 항공시장은 너무 좁고, 세계적인 항공시장에 서고 싶었던 작은 바램은, 캐나다로의 이민을 선택하게 되었고, 수많은 밤과 낮 동안 고민하고 준비하며, 한번도 발 붙여 본적 없는 캐나다 땅을 2004년 12월 어느 추운 겨울날 무작정 날아왔다. 그로부터 7년을 대학원을 다니고, 취업준비하고, 약 3년간 작은 회사에 근무하다가, 지금에야 내가 가장 원했던 회사에 원하던 일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어쩌면, 한국의 항공회사(KAI)의 5년 경력과 자동차(대우정밀)의 3년 경력도 도움이 많이 되었으리라 생각이 든다. 어쩌면 한국에서의 대기업에 대한 실망감이 나의 터닝 포인트가 되었을 지도 모른다. 또한, 나를 내다 던질수 있었던 것은 한국에 남겨둘 미련이 적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어쩌면 부양가족에 대한 부담이 적은 이때가 마지막이라 생각했기에 무모하게 도전할 수 있었던 것 같다.
누구에게나 고난에 두려움은 같다. 내가 늘 벼랑 끝에 내 몰렸을때 너무나 두려웠고, 마치 결코 이 고난을 이겨내지 못 할것 같았다. 하지만, 이 고난을 지나칠때마다 나는 조금더 많이 성숙해 지고 강해지는 것 같았다. 지금은 좋은 직장에 있지만 어느 순간 어떻게 될지 모르니 불안하긴 마찬가지이나, 그 동안 많은 고난에 내성이 생겼는지, 이제는 뭐 어떻게든 되겠지란 배짱이 약간 생긴것 같다. 사람들은 힘들것 같은 고난에 너무 과대포장해서 두려워하는 것 같다. 아마, 격어보지 못해서 더욱 그런 두려움이 큰 것 같다. 특히, 젊은층이 더 심한것 같다.
어느 누구도 고난과 현재 자신의 고민과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에 즐거워하는 사람은 없다. 고통스럽고, 어서 이런 역경이 끝나기만을 바라지만, 어느 순간, 뒤돌아 보면, 내가 살아온 삶을 가치있게 만들어 준 것들이 이런 역경과 고난 속에서 자라났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say something 2011. 9. 17. 13:53
아주 예전에 후배랑 설전을 한 기억이 난다. 당시 나는 중국의 발전속도나 디자인면에서 획기적으로 발전하고 있으므로, 곧 한국이 중국의 경제에 따라 잡힌다고 말했었고, 후배는 아무리 그래도 어떻게 중국인들이 한국을 따라잡겠냐고 어림도 없는 소리라고 강변했다. 벌써 십몇년의 전 일인것 같다. 불현듯 생각해 보니, 몇년 전에 본 뉴스에 중국의 경제력이 규모면에서 일본을 앞섰다고 본 기억이 난다. 이제 아무도 중국이 다음 세대 혹은 지금 세대의 경제 주역이라는데 의견을 다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얼마전에 약간의 돈을 뮤츄얼 펀드에 1년 정도 넣어둔 적이 있다. 한 1년여를 조금씩 올라 10%가 넘어가는데, 일본의 지진과 쓰나미가 발생해서 단기간에 그동안 조금씩 늘었던 10%가 거의 1-2%대로 줄었었다. 다행히, 곧 정상으로 회복이 되었지만, 그때는 빨리 해약을 해야하는지 어떤지 맘 고생이 심했었다.
끊이지 않는 유럽의 경제 불안과 미국의 부채 덕에 곧 경제가 회복하리란 전망은 벌써 2년이 넘어가고 있다. 미국의 집값은 계속 떨어지고 있고, 다우나 나스닥도 계속 등락을 고수하고 있다.
세상이 이렇게 돌아가자 얼마전 부터 자주 볼수 있는 단어가 Uncertainty이다. 불확실성... 비단, 주식의 문제 뿐만이 아니라 생활경제 전체가 신뢰를 얻지 못하고 불안에 휩싸이게 되었다. 개인적으로도 레이오프와 취업을 연속적으로 맞이했으며, 덕분에 안 짤릴줄 믿고 집을 샀다고 하루도 못 살고 다시 파는 어이없는 경험도 하게 되었다. 물론, 금전적으로도 적지 않은 손실을 안게되었다.
이러한 불확실성 덕분에 사람들은 장기적인 계획 대신 단기적인 단발성 계획을 주로 하게 될것이고, 이는 우리의 라이프 스타일에 많은 변화를 가져올 것이다. 장기 모기지를 얻는 대신, 단기 렌트가 늘 것이고, 소유 대신 대여(리스)에 대한 요구가 확대될 것이란 생각이 든다.
불연듯 드는 생각이, 이것은 불확실성 시대의 끝일까? 시작일까?
say something 2011. 9. 10. 13:16
정말 눈코뜰쌔 없이 바쁘다는 말이 어떤말인지 실감할 정도로 바빴던 지난 몇달입니다. 7월 8일 예상치도 못하게 첫아이가 29주로 태어나면서 6주 정도를 거의 매일 1시간 거리의 병원을 다녀야 했고, 이사 온지 겨우 채 한달도 안되서 아이를 낳는 바람에 3주 정도는 직접 와이프의 산후조리를 해야했고, 전에 살던 집도 겨우겨우 팔아서 이제야 조금씩 안정이 되어가네요. 그동안 1년 정도 있을 콘도를 구해서 토론토에 맡겨 두었던 짐을 옮겨 이사를 마무리 했고, 수많은 Bill 들과 서류들 사이에 거의 파 묻힐뻔 했습니다. 회사는 아직 적응이 안되서, 이리 저리 두문불출 하느라 맘고생도 많았구요. 다행히 아이는 건강히 퇴원해서 집으로 왔고,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 같은 수많은 일들이 어느덧 하나둘씩 마무리가 되어가네요.
아직 몬트리얼에 산지 몇달 되지는 않았지만, 토론토에서 불과 500km, 오타와에서 겨우 150km 정도 떨어져 있을 뿐인데, 마치 다른 나라에 온 것 처럼 이것저것 생소한 것이 하나 둘이 아니네요.
제일 끝 차이가 바로 언어인데, 다행히 일상생활에는 거의 대부분의 몬트리얼 사람들이 영어와 불어 둘다에 능해서 아직까지는 생활에 큰 불편함이 없었는데, 회사에는 거의 회의시간에 불어만 사용하기에 좀 많이 답답하군요. 물론, 제가 이야기 할때는 영어로 하기는 하지만, 아무래도 절대적으로 대부분이 사람이 불어를 사용하는데, 저의 편의를 위해서 영어로 하는데는 어디까지나 한계가 있는것 같더군요.
그외에, 자동차 면허증, 헬쓰카드 기타 의료보험이나 세금등등 너무도 온타리오와 차이가 많이 나는군요. 의료보험은 회사보험과 연계해서 약값은 전혀 내지 않는 좋은 점은 있는데, 세금이 인컴택스와 세일즈 택스 둘다 너무 많아서 참 걱정이 많네요. 아이 때문에 렌트비도 전에 원베드에서 두베드로 옮겨서 많이 올라갔고, 생각보다 지출이 많아져서 과연 몬트리얼에서 잘 살수 있을까하는 걱정도 듭니다. 뭐, 다른 대안이 없어서 어떡하든 잘 버텨야 하겠지만요.
어느덧, 가을이 왔네요. 한국은 추석이라 무척 들뜬 분위기인데, 여기는 조용히 가을을 준비하는 것 같습니다.
say something 2011. 7. 1. 15:52
어느덧 캐나다에 와서 일한지도 4년차가 되어간다. 지금은 얼마전에 회사를 옮겨서 3주 밖에 지나지 않았지만, 전 직장과 지금의 직장이 규모면에서 큰 차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기본적인 직장문화는 크게 다르지 않은것 같다. 다만, 한국에서 거의 10년에 직장생활을 하였는데, 지금쯤엔 한국과 캐나다의 직장생활을 어느정도 비교해 볼 수 있을 때가 된것 같은 생각이 든다.
사실 직장생활을 비교할때는 그 회사의 크기도 많이 영향을 미친다. 무조건 큰 회사가 좋은 것은 아니나, 회사의 기업문화는 400명일때와 3000명일 때는 확실히 다른것 같다. 캐나다에서 전에 다니던 회사가 직원이 400명 정도 였는데, 지금 6만명이 넘게 다니는 직장과 참 많은 면에서 차이가 난다. 오히려, 약간은 한국에 있을때(두 회사를 다녔었는데, 모두 3000명이 넘은 회사들이었다.) 분위기도 나는 것 같다. 파티션이 나누어져 있는 큐비클에, 비좁은 복도하며..
캐나다와 한국 직장문화의 가장 큰 차이점은 아마도 서열중심의 계급의식일 것 같다. 물론, 캐나다도 직위가 있고, 해당 직위에 따라, 같이 일하는 팀원들에게 적절히 일을 분배하고, 지시하게 된다. 또한, 그들에게는 팀원 중에 어려운 점이 없는지, 팀원끼리 의견충돌이 발생활 경우, 적절히 조율시키는 역활도 포함되어 있다. 한국과 마찬가지로 중간관리자의 경우, 위에서는 파워게임에, 팀원들 관리까지, 참 쉽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한국을 떠나온지 거의 8년이 되어서, 아마도 지금쯤엔 많이 바뀌었을 거란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예전에 한국에서 회사 다닐때의 획일적인 서열의식에는, 아직도 의아한 생각이 많이 든다. 왜 그들은 자기가 나이가 많고, 직위가 높으면 직위가 낮은 사람에게 막대해도 된다고 생각하는지 알 수가 없다. 심지어 회식이나 사석에서도, 무슨 군대에서 부하인것 처럼, 상사에게 충성해야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아직도 많이 남아 있음을 부인할 수는 없는 것 같다.
한국에 있을때 가끔씩 "왜 벌써 퇴근하냐?" "퇴근후에 뭐하냐?" 란 이야기를 들을때 마다 이해가 가지 않는게, 왜 자신이 내가 회사와 계약한 8시간외 근무에 대해서 신경을 쓰는지 알 수가 없다. 물론, 일이 채 끝나지 않은 채, 무리하게 다음날로 업무를 넘기는 경우라면, 약간의 업무진행에 대하여 신경을 쓰는 건 이해할 수 있으나, 특별한 업무가 남아있지도 않을 상황에 '내가 남아 있는데 너는 무슨 배짱으로 벌써 가니?'란 시선으로 말하는 무능한 상사 밑에는 일하는 사람들이 안쓰럽다. 더군다나, 휴가를 낼때마다 왜 휴가를 내는지 물어보는 상사들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내가 필요해서 쓰는 휴가를 왜 자신들이 이러쿵 저러쿵 이야기 하는지... 참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다. 전에 한국 방문차 3주 휴가를 낸적 있는데, 매니저는 반응은 한국에 오랫만에 가니 잘 갔다오라는 한마디 였었다. 만일, 한국에서 3주 휴가를 낸다고 하면, 내 줄리도 만무하지만, 이런저런 잔소리를 며칠씩 들어야 하지 않을까?
기업문화, 직장문화는 기업의 성공을 좌지우지 하는 Key point중에 하나라 생각한다. 상사,부하 이렇게 이분법적인 사고로 서로를 나누지 말고, 서로 상대한테 고객이라고 생각하는 마인드가 필요한것 같다. 상사도 팀원을 고객으로 생각해서 어떤 서비스가 필요한지, 어떻게 그들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팀원들의 요구에 유연하고 객관적으로 반응하는 한국의 직장문화가 하루빨리 정착되었으면 좋을것 같다.
Montreal 2011. 6. 25. 01:15
운이 좋은지 Layoff된지 채 두달이 지나지 않아 캐나다의 Bombardier Aerospace로 입사가 확정되었다. 이런저런 개인적인 사정으로 6월 13일 첫 출근을 하게 되었다. 현재 직원 62000명을 넘기는 이 회사는 주로 항공과 기차쪽의 사업으로 양분되어 있고, 항공과 기차쪽 모두 비슷한 비중(49:51이던가?)를 차지하는 기업이다. 토론토의 지하철도 모두 bombardier 쪽으로 알고 있고, 한국에서도 여러군데 bidding에 참여했던 것으로 알고있다.
항공쪽은 보잉, 에어버스에 이어 세계적으로 3번째의 항공기 제작회사이다. 주로 비지니스제트와 커머셜제트로 나누어 있는데, 최근에 새로 개발되는 CSeries가 100~120명정도의 인원을 태울수 있는 항공기가 곧 생산될 예정이다.
근무하는 곳은 BAEX로 Bombardier Aerospace EXperimental의 약자이다. 약 200명의 직원들이 각종 항공기의 시험평가나 비행시험을 서포트하는 역활을 한다. 일하는 곳은 St.Laurant (plant 1)이고, 대충 plant 9까지 있는 것으로 보아 몬트리얼에 8개의 공장이 더 있는 모양이다. 또한, 캐나다 토론토, 영국의 Belfast, 멕시코에 다른 공장들이 있다고 한다.
예전에 대한항공의 공장도 방문한 적이 있고, KAI에서도 일한적이 있어, 항공기 제작과정을 보는데 참 익숙하다고 생각했었는데, Bombardier는 또 다른 느낌을 주는 것 같다. 거대한 항공기를 제작하는 모습을 눈앞에서 보는 광경은 늘 생소한것 같다. 물론, 거대한 조선사업과 비교할 수는 없겠지만, indoor에서 제작하는 것들중에는 둘째가라면 서럽지 않을까 싶다.
아직은 회사일도, 회사도 서먹서먹한 느낌이지만, 곧 몇일이 가고, 몇달이 가면 익숙해 지리라 생각한다.
say something 2011. 5. 20. 20:48
2011년 3월 28일, 오후 1:30분쯤 회사전체 메일로 2:00 에 모이라는 공지가 사장이름으로 날아왔다. 모두들 갑작스런 소식에 약간은 어리둥절 했지만, 그 전에도 비슷하게 한두번 모인일이 있어서, 아마 마찬가지 아닐까란 생각으로 약간 불안한 마음을 가지고 모이게 되었다. 벌써 몇달째 나온나던 펀딩은 아무 소식이 없었고, 몇일전부터 펀딩이 정부로 부터 나오지 않으면 일부 직원을 레이오프(임시휴직)시킨다던 이야기는 있었지만, 정부에 대한 압박용이라고 들어서 크게 걱정하지는 않은 터 였었다.
사장은 2:00에 단상으로 올라가 짤막하게 20여분 동안 왜 레이오프가 필요한가를 설명하고, 이어서 런던(온타리오, 캐나다)의 시장이 나와서 몇마디 하고, 끝났다. 이어, 사람들은 미리 준비된 미팅룸에 들어갔고, 처음에 레이오프된 사람의 명단을 부르기로 했으나, 너무 많은 관계로, 남을 사람들 이름만 부르는 걸로 했다. 십여명의 이름이 호명된 뒤, 나머지 사람은 모두 레이오프가 되기로 했다고 말하여, 각자 자기 자리로 돌아가 짐을 싸서 돌아가라고 말했다.
그리하여, 380명중에 213명이 하루아침에 레이오프가 되었다.(나중에 정리된걸 보니 최종 233명이란다.) 새로 개발하는 프로젝트의 거의 95%정도가 레이오프가 되었다. 이런 대규모의 레이오프가 사실 처음은 아니다. 처음 입사한지 얼마되지 않아서 800명 중에 200명 정도가 레이오프 되었었고, 이후에도 80여명의 계약직 사원들을 하루 아침에 레이오프 시킨 사례가 있긴 했다. 이리하여, 태어나서 처음으로 캐나다라는 이국땅에서 레이오프를 맞게 되었다. 레이오프의 정식적인 의미는 회사의 경제적 사정으로 인하여 임시로 일정기간을 휴직하게 하는 제도로, 경제상황이 회복되면 레이오프된 직원들을 우선적으로 재채용(Recall)하게 되어 있으나, 사실 이런 정의는 크게 의미를 두지 않는다. 대부분 레이오프가 되면 다른 직업을 우선적으로 찾게 되기 때문이다. 언제 다시 회사에서 부를줄 알고 기다리는 사람이 있을지... 사실 처음에 레이오프된 200명 중 공식적으로 리콜된 사람은 거의 없었다.
레이오프로 좌절할 시간이 없었다. 문제는 올해초 와이프의 임신으로 약 3주전에 집의 구매를 완료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문제는 집을 구매할시 은행으로 부터 모기지(은행대출)을 받기로 했는데, 레이오프가 되면서 은행에서 대출을 해주지 않을 가능성이 커졌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구매계약을 취소하자니, 이미 판매자는 다른 곳으로 이사를 가서 아마 취소해주지 않을 거란 이야기만을 전해 들었다. 아마도 내가 선택해야할 방법은 준비해 놓은 20% Downpay를 35%로 늘이는 방법이 있는데, 현실적으로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다. 결국 2주간 고민하고, 방법을 알아본 결과, 다른 은행에서 모기지를 얻는 방법으로 마무리하게 되었다.
시간되는 대로, Job Fair도 가고, 이력서도 넣고 해서, 몇번의 전화인터뷰와 한 두 회사와 인터뷰를 보게 되었다. 전에도 한번 해본 경험이 있었지만, 경제적 사정이 좋지 않은 지금, 아무래도 5개월 정도 재취직하는데 걸릴거라고 생각을 했는데, 2달이 채 되지 않아, 원하던 회사에서 연락이 왔다. 그리하여, 지금 다녔던 회사보다는 나은 조건으로 새로운 회사로 입사가 확정이 되었다. 이제 한달여가 지나면 새로운 회사에서 새로운 동료들과 일을하게 될 것이다.
첫 레이오프. 집 문제로 더 고통을 받아서, 오히려 레이오프에 대한 고통은 상대적으로 적었지만, 새로 태어날 아이와 가장으로서의 걱정으로 한동안 마음고생이 심했었다. 그리고, 전에는 내가 레이오프되기 전에 나갈 수 있을 거란 생각을 했었지만, 이제는 언제든 레이오프 될거란 생각에 지배되기 시작했다. 마치 트라우마가 된것 같이... 만일, 앞으로 집을 사게 된다면, 반드시, 레이오프시 집의 모기지를 갚아주는 보험에 가입하지 않을까?
say something 2011. 5. 15. 22:29
얼마전 아는 취업을 앞둔 지인과 이야기할 기회가 있었다. 여러가지 캐나다에서의 취업활동에 대해서 이야기 하는 중에 예전에 다니던 한국 회사에서의 한국엔지니어와 미국엔지니어에 대하여 이야기 거리가 생각이 나서, 재미있게 이야기를 하였고, 혹시나 다른 분들도 공감하거나 참고할 이야기 거리가 아닐까 싶은 생각에 글로 옮기게 되었다.
어느덧 캐나다에 온지도 7여년이란 시간이 지났고, 한국에 있을때 근무한 곳은 한국항공우주산업(주)-이하 KAI 란 회사였다. 당시, 미국 Lockheed Martin 이란 회사와 합작으로 국내 최초의 초음속 훈련기/전투기 T-50 개발이 한창일 때였고, 미국 Lockheed Martin에서 파견나온 수많은 엔지이어들과 그외 해외전문엔지니어들로 북적북적했던 시절이이었다. 당시, 워낙 해외 엔지니어들이 많았고, 많은 한국엔지니어들은 이들이 얼마나 받고 한국이란 곳에 와서 일하는지 궁금한 사람들이 이런 저런 불확실한 경로로 이들의 연봉에 대한 루머들을 만들어 냈다. 뭐, 정확한 내용은 알수가 없지만, 재미있던 것은, 당시 똑같은 미국 소재 대학을 졸업하고 함께 일하는 한국 엔지니어와 미국 엔지니어가 있었다. 한국 엔지니어 분은 미국에서 아주 유명한 학교에서 아마 박사까지 했던 것으로 기억이 난다. 따라서 한국의 기업에서도 높은 지위에 Team Leader였었다. 반면, 미국엔지니어는 아마 석사 정도 였던것으로 기억이 나는데(한국분과 같은 미국 학교), 경력도 한국분보다 많이 적고, 지위도 Senior Engineer 정도 였던것 같다. 여러 모로 한국엔지니어분이 훨씬 많은 연봉을 받아야 함에도 불구하고, 미국엔지니어가 1억이 넘는 연봉을 받는 반면에 한국 엔지니어 분은 아마 미국 엔지니어의 반이 되지 않았던 걸로 기억이 난다. 심지어 특정한 해외전문 엔지니어의 경우 한국의 Junior 연봉의 열배를 받는 분들도 있었던것 같다. 그래서, 그 당시 우리끼리, 저분 한사람 받은 연봉이 우리 열명 받는 월급과 같다고 농담조로 이야기하건 기억이 난다.
벌써 한 십여년이 지난 예전 일을 반추해 보며, 저런 불합리한 점이 나를 한국에서 떠나오게 한 하나의 이유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물론, " 왜 이민을 오셨어요?"란 물음에 대한 나의 공식적인 대답은 "새로운 도전을 위해"이다. 하지만, 단순히 은행에서 일하는 사람이, 제조업에 일하는 사람보다 훨씬 많은 연봉을 받고, 예전에 114에서 오래(약 20년) 일했다고, 그 분들이 연봉 오천만원이상을 받는 사회가 나는 이상해 보였다. 그리고, 확인해 보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다른 세상은 어떤지...
십여년이 지난 지금은 한국도 그렇고, 캐나다도 그렇고 참 많은게 바뀐것 같다. 오히려, 일부 직종은 한국의 회사에서 지내는게 캐나다에서 지내는 것보다 나은 부분도 많아 졌다. 특히, 일부 IT부분이나 금융권의 경우 높은 캐나다의 세금을 생각하면, 한국에서 지내는게 훨씬 더 윤택한 삶을 보장한다.
그런 부분을 제외한 엔지니어들에게는 해외에 나와서 일해보는 것도 좋은 경험이 될것이라 생각이 든다. 물론, 모든 엔지니어에게 해당되는 것은 아니다. 한 가정의 가장이고, 부양해야 하는 가족이 있다면, 해외에 나와서 다시 공부를 하고, 취업을 하고, 영주권을 얻는 track이 너무 큰 부담으로 갈 가능성이 많다. 어느 정도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는 싱글이라면, 몇년간 일을 쉬고, 대학원 공부해서 미국이나 캐나다에서 취업을 시도하는 것도 하나의 기회가 될 수 있을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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