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행기 생산현장을 걷노라면...

say something 2012/01/24 13:36
주 업무가 항공기 생산쪽은 아니지만, 가끔씩 생산라인을 지나가다 보면, 참 인간의 상상력의 한계는 어디까지 인지 궁금해 집니다. 물론, IT쪽의 급속한 발전에 비하면 금전적인 규모면에서는 다르겠지만, 우선, 사이즈가 엄청나게 크죠. 배 같이 건물 외부에서 만드는 구조물을 제외하고는 아마 가장 크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제가 지나가는 쪽은 주로 항공기의 cockpit 부분을 만듭니다. 항공기의 앞부분이죠. 일부 Airbus의 날개쪽 구조물이나, 후방동체를 만드는 부분도 있기는 하지만, 거의 대부분 cockpit에 sub-systems를 만들더군요. 항공 엔지니어링의 재미있는 부분 중에 하나는 정밀도 라고 생각합니다. 대부분의 규모가 큰 Part들은 그 크기가 커지면서 당연히 공차도 늘어나게 되는데, 항공기 부품은 거의 1/1000 인치 단위까지 정밀해야 하니까요.

사무실에서 일할때는 정신없이 하는 일만하고, 너무 익숙해져 있어서 잘 못 느끼는데, 가끔씩 이렇게 현장을 지나갈때면 '아, 내가 정말 원하던 곳에서 일하고 있구나!' 란 생각이 불현듯 듭니다. 한국에서 일할때도 항공쪽이었지만 방위산업쪽이었고, 전에 일하던 곳은 작은 2~5인승 항공기 개발이라, 같은 항공계열에서 일했는데도 느낌이 다르더군요. 지금 다니는 일하는 곳에서 지금까지 제작된 항공기들이 전세계에서 3초에 한대씩 이륙 혹은 착륙을 한다고 교육 갔을때 HR분이 이야기 하실때 원지 모를 자부심도 생기더군요.

사람마다 어떤 회사가 좋다 나쁘다를 평가하는데는 여러가지 요소들이 있겠죠. 페이나 안전성도 중요한 요소임에 틀림없으나, 그렇게 바깥에 보이는 외적인 가치 보다도, 본인에게 중요한 내적인 가치도 간과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본인이 선택한 길이고, 그래서, 다른 길이 보다 예쁘고, 잘 꾸며져 있다고 해도, 내가 선책한 길이 더 소중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때로는 가시밭길도 있었죠, 어렵게 대학원 졸업하고 1년여동안 1000군데 이력서를 넣을때, 새로 태어날 아이를 위해 집을 산지 2주 만에 레이오프 되어서 심적공황으로 잠도 못잘때. 근데, 참 신기하게도 이렇게 저렇게 해서 다시 또 살아가게 되더군요.

지금이 살아가는데 지치고 힘들고 마치 벼랑 끝 같더라도, 다른 이와 비교해 초라해 보여도, 시간이 지나 뒤돌아 보면 아마 내 삶의 거름이 되는 시간이었을지도 모르는 것이지요.

많은 분들이 새해에는 조금 덜 아프고, 조금 더 행복해지는 한해가 되었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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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2시 40분에 퇴근하는 사람들 (몬트리얼)

say something 2012/01/19 12:36
저는 몬트리얼의 한 회사에 근무하고 있습니다.
늘 오후 2시 40분쯤 되면 한 무리의 사람들이 바이바이 하고 퇴근을 한답니다. 처음엔 참 적응이 안되더군요. 전에 다른 지역의 다른 회사에도 flexible time system을 이용하여 출퇴근시간을 유연하게 하기도 했지만, 보통은 3시 반을 넘어서 퇴근을 했었거든요. 아마 여기도 처음엔 그랬던것 같은데, 몬트리얼의 교통체증이 가속하되면서, 점점 땡겨진게 지금은 2시 40분이 된 모양입니다. 그러니깐, 6시 출근을 해서, 40분 점심시간을 계산하면 8시간 40분을 회사에 있게 되는 거죠.

장점은 당연히, 원거리에서 출퇴근 하시는 분들에게 엄청나게 출퇴근 시간을 줄일수 있겠죠. 러쉬아워일때 10분 걸리던 거리가 1시간씩 걸리곤 하니깐요. 또하나 큰 장점은, 아마 맞벌이 하시는 분들에게 특별히 유용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만일 커플중 한사람이 일찍 퇴근해서 아이를 픽업해서 올수만 있다면, 다른 한 사람은 아침에 아이들 아침먹이고, 학교에 데려다 주고, 9시쯤 출근해도 되니깐요.

단점은, 회사 내에서 회의시간 잡기가 좀 힘든것도 있고, 아무래도 일찍 출근하는 사람들과 9시 출근해서 5시 40분쯤 퇴근하는 사람들과 차이가 많다보니 업무조율에도 약간 아려움이 있긴 합니다.

물론, 모든 직원들에게 해당되는 사항은 아닙니다. 특별히, 자신의 일이 시간제약이 있거나, 다른 팀원들과 같이 일을 해야하는 테크니션 같은 경우는 주어진 출퇴근 시간을 엄격히 지켜야 하지요.

고용주냐 피고용인이냐의 입장 차이에 따라, 호불호가 갈릴수도 있겠지만, 좋은 직장문화가 있는 곳에 인재가 모이고, 이직률도 줄어 들지 않을까 생각이 듭니다. 특히, 맞벌이하는 가정이 늘고 있는 한국도 이런 시스템을 도입하면 직원들 로열티가 엄청 올라가지 않을까요? 더불어, 줄어든 출퇴근 시간으로 개인의 삶의 질은 향상되고, 엄청나게 막히면서 생산되는 환경공해도 줄일수 있는니, 여러모로 좋을 것 같아요.

특히, 서울같은 교통정체가 심한 경우는 많은 기업들이 참여하면, 교통량도 분산되고 출퇴근 고통도 좀 줄고, 괜찮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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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 취업의 문, 부서질때까지 두드리기 (Part 1)

say something 2011/12/02 13:31
한국에서의 첫 직장을 잡을때의 일이다. 95년의 일이니 한참 전이긴 하지만, 지금도 그때 생각하면 아찔하다. 당시 울산에서 학교를 다니다, 취업시즌에 몇군데 넣은게 마지막 면접까지 떨어져서 막막할때쯤, 우연히 집 근처의 회사에 원서를 넣었다. 면접을 보고, 마침 울산에 있던 자취생활을 정리하고, 부산으로 이사를 했을때 였다. 그래도, 혹시나 몰라서 학과서무 보시는 분에게 혹시라도 면접된 회사에게 연락이 오면 꼭 연락해 달라고 부탁도 했었다. (어떻게 될 줄 몰라서, 일단 연락처를 학과사무실로 해 두었다.), 시간이 지나도 연락이 없길래 떨어진 줄 알고 있었는데, 우연히 울산에 들렀는데, 마침 학교에서 근로장학생으로 근무하던 룸메이트가 '너 혹시 전보온것 연락 받았어? 자세히는 모르겠는데, 우리과 우편물 수령하려다 얼핏 보니, 너한테 온 전보가 있는것 같던데... 뭐 확실하지는 않지만...' 이라고 할길래 그냥 내심 무슨 일일까? 하고 다음날 다시 울산으로 가서 학과 사무실로 가보니. 합격통지서가 전보로 와 있었다. 어이가 없어서 학과사무실에 어찌된 일이냐고 물으니, 학과서무 보는 분이 휴가라서 아무도 신경을 안 썼다는 이야기 였다. 게다가, 바로 다음날이 합격자 소집일이었고, 정말 단 하루만 늦게 발견했어도, 합격자 소집일에 참석하지 못했을 거고, 아마 합격취소 되었을 지도 모르겠다.

두번째 회사로의 이직은 정말 오래걸렸다. 꼬박 1년을 하루에 최소 3시간 이상씩 인터넷으로 취업사이트를 뒤지며 지냈던것 같다. 그런데 그렇게 맘에 딱 맞는 회사를 찾기가 어려웠고, Simens automotive 에 지원을 딱 한번 했었는데, 서류심사 조차 통과하지 못했는지, 연락이 없었다. 거의 1년만에 첫번째 직장의 경력과 비슷한 분야로 3년 8개월만에 두번째 회사로 이직을 하게 되었다. 다행히 처음에 회사에게 무척 어려웠음에도 조금만 견뎌서 다음회사에 입사할때 반드시 경력직으로 이직하자는 생각이 적중했는지, 다행히 경력직으로 두번째 회사에 입사하게 되었다.

오년을 전문 엔지니어 계약직으로 일하다가, 캐나다를 오게 되었고, 2년의 대학원 생활을 마치고, 다시 취업전선에 서게 되었다. 처음에 캐나다에 오자마자 잠깐 이민자학교에 있었던 적이 있었는데, 그때 선생님 한분이 자기 학생중에 1000군데 이력서를 써서, 회사를 들어가게 된 분이 있다며 무척 자랑을 하였다. 그때 생각엔 어떻게 1000군데나 이력서를 넣을 수 있지? 라고 생각했는데, 나중에 내가 바로 한 1000군데의 이력서를 쓰게 될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기회가 있을 때마다 어떻게 하든, 영어를 많이 배우고 싶었지만, 해외에서 그것도 처음하는 대학원 생활을 그렇게 만만치 않았다. 그래서 시간도 없고, 대학원의 수업도 첫해에는 몇과목 수업이 있었지만, 2학기 수업이 끝난 뒤에는 논문에 집중해야 하기 때문에, 거의 혼자서 공부하는게 일반적이다. 그나마, 외국인을 위한 영어강좌와 논문지도 클래스가 있었고, EWB (Engineer Without Boarders) 클럽활동을 하는게 영어를 배우는데 많은 도움이 되었던 것 같다.

학교를 졸업하고, 한달뒤 부터 이력서를 넣기 시작했지만, 부족한 영어에 허술한 이력서를 가지고, 아무리 많이 이력서를 보내봤자, 거의 대부분은 연락이 없었다. 그래서, 여러 군데 (학교, 취업 카운셀러 등등)을 많이 만나면서, 이력서 교정도 많이 받고, 책도 사서 읽었다. 가끔씩 보면, 몇몇 한국분들이 자신의 이력서를 굉장히 공개하기 꺼려하기도 하는데, 내 생각은 달랐다. 무조건 많은 사람들이 읽고 피드팩을 많이 받는게 좋다고 생각한다. 물론, 어떤때는 서로 상반되는 견해가 나오기도 했고, 별것 아닌것 같은 내용도 많지만, 좋은 의견을 많이 받아 들이고 적극적으로 수렴하려고 생각하면 정말 많은 도움이 되었던 것 같다. 가장 인상 깊었던 조언 중에 하나는 한글이름으로 된 부분을 삭제하라고 하시던 분이 있었다. 굳이 네가 외국인인걸 티 낼 필요 없다는 것이다. 어차피, 너한테 관심있는 사람이라면, 네가 나온 학교랑 회사이력보면 다 아는데, 굳이 첫인상을 외국인이라고 강조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또한, 연락도 이메일로만 보낼게 아니라, 팩스로도 보내고, 전화도 가끔씩해서 진행사항도 체크해 보라고 권유해 주기도 했다. 또, 책에 보니, 되도록이면 전공 관련된 다양한 기관, 예를 들어, 나의 경우엔 항공협회에 나와있는 항공업체 리스트 에 있는 모든 항공업체에 이력서를 보내기도 했다.

이렇게 대충 오백개 정도 보냈을때, 한 두군데서 연락도 오고, 인터뷰도 가고 했었다. 어떤 사람은 인터뷰를 갈까말까 고민하는 분들도 많았는데, 나는 모든 인터뷰에 거의 다 갔다. 어디서 본 내용인데, '자기가 가고 싶은 회사에 인터뷰는 제일 나중에 가라'란 말이 있었다. 즉, 그동안 인터뷰를 보면서 실전연습을 하고, 내공이 많이 쌓였을때 정작 자신이 가장 희망하는 회사에 인터뷰를 가란 이야기 이다. 대충 100분데 이력서를 보내면 3-4군데에서 전화인터뷰가 오고, 어쩌다 한 두군데에서 온사이트 인터뷰가 오는 것 같았다.

나머지는 다음에 써야 할 것 같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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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미 FTA, 규제철폐, 영화 'Too big to fail'

say something 2011/11/23 13:25
한국의 한미FTA가 한나라당의 기습처리로 국회를 통과했다는 소식을 듣고, 가슴 한구석이 찹찹함을 느낀다. 솔직히 한국에 살지는 않아서 정확히 어떤 점이 손해이고, 앞으로 한국에 어떤 미래가 올 지 예상하기는 불가능 하겠지만, 예전 IMF와 여러가지 그 이후의 상황을 보면, 틀림없이 많은 국부가 유출될것이 불가결해 보인다.

사실 나는 엔지니어고, 경제에 대해서는 한참 무지한 상태에서 이런 이야기를 한다는 것이 모순일수도 있지만, 이상하게도 FTA가 통과되었다는 소식을 듣자, 영화 'Too big to fail' 이 자꾸 기억이 난다. (어쩌면 선무당이 사람잡는다고 사실을 너무 사실이상으로 확대해서 생각하는 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나는 HBO이 만든 이영화를 보고, 규제없는 자유 무역주의자에서 약간의 규제주의자로 바뀌었는지 모른다.

2007~2008년 미국경제의 붕괴를 다른 영화/다큐멘터리 두편을 관심있게 봤었는데, 하나는 'inside job' 이란 다큐이다. 이 다큐에서 월가의 모럴 해저드를 비롯하여, 미국 정부의 부도덕성, 소위 말하는 이론 경제학자과 거대 자본들(리먼 브라더스, 모건 스탠리, S&P 푸어사 등등)의 단합등등.. 이루 형언할 수 없는 '미 자본주의 경제체계'의 배신감을 느끼게 해 주는 다큐였다. 더 웃긴건 이런 경제재난으로 서민들은 파산과 고통을 온 몸으로 안고 살아가는데 반해, 월가에 사람들은 정말 천문학적인 금액을 손에 쥐게 됬다는 것이다. 그리고, 대부분의 돈은 미국 서민들이 피 땀 흘려 번 돈들이다.

'inside job'이란 영화에 이렇게 까인 미 보수세력들이 후원해 만든 영화가 HBO의 "Too big to fail'이다. (정확히 후원을 했는지 어땠는지는 알 수 없으나, 대충 스토리를 보니 후원했다고 할 만 한것 같다.) 이 영화에서는 주인공인 미경제관료가 세계경제 붕괴를 막기위해 엄청나게 고뇌하며 고분분투하는 장면들로 구성되어 있는데, 그 중에서도 몇가지 흥미로운 사실은 1) 한 여성분의 대사였던것 같은데 '우리가 지금 이런 사태를 만든 장본인들 한테 돈을 주며 이 고난을 막아 달라고 부탁해야 된다는 말인가요?' 라는 아이러니 2) 규제완화를 외치던 장본인들이 다 한통속(이론 경제학자, 미 경제 관료, 대통령 보좌관(?) 등이 대부분 전/현직 거대 자본들의 이사 혹은 사회이사 등으로 관련이 있는 인물들이다.)이었다는 점 3) 자본에서 리스크(Risk)가 분리되면서 결국 모든 이익은 몇몇의 거대자본들의 주머니로 들어가게 되는 천재적인 메커니즘 을 볼 수 있었다.

이 두편의 영상물과 한미 FTA는 어떤 관련이 있을까?
단도직입적으로 이야기 하자면, 미국에서는 이제 이 메커니즘이 다 드러났고, 동시에 작용한다는 검증도 되었으니, 이것을 다시 재사용해 먹을 시장을 호시탐탐 노리고 있고, 어쩌면 한국의 자본시장이 그 중 하나가 되지 않을까? 란 생각이 들었다.

예를 들어, 이번의 FTA를 계기로, 나중에 서서히 미국의 은행이 한국에 들어가게 된다면, 미은행의 Risk management방법으로 한국의 많은 은행은 큰 타격을 받을 거란 생각이 든다. 한국의 은행은 지금까지 너무 보호되어 왔다. 예를 들어, 새로 집을 사는 경우, 집을 담보로 잡고, 보증인 세우고 등등 절대 손해를 보지 않을 방법으로 지금까지 영업을 해 왔다. 미국의 은행은 5%만 다운페이를 하면 집을 살수가 있다. 1억원짜리 집을 사는데 500만원만 넣으면 되는데, 당연히 미국은행에서 론을 얻어서 집을 사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그럼, 미국은행은 9500만원을 신용대출 해주는 것일까? 당연히 아니다. 예를 들어 집을 경매로 팔 경우 약 6000만원 정도 받을 수 있다면, 3500만원에 대해서 일종의 보험을 드는 것이다. 따라서, 미국은행은 전혀 손해보는 것이 없다. 그리고, 약 3개월 연체되면 바로 경매로 내 놓는다. 실제, 지금 미국에서도 3개월 연체되면 바로 집 주인의 의사와 상관없이 은행이 집을 경매로 내 놓을 수 있다. (덤으로 아마 부동산시장은 아마 미친듯 오르게 되지 않을까 생각된다. 누구나 쉽게 돈을 빌릴 수 있는데 누가 집 사는 것을 참고 있겠는가?)
이런게 아마 Risk를 따로 분리해서 매매하는 경우인 것 같다. 그리고, 이런 보험회사들이 1차,2차 이런 순으로 생겨나고, 그 종류도 프라임, 서브프라임씩으로 나누어 매기게 된다. 그러나, 이미 미국의 경우를 보듯이 언제가는 이런 폭탄 돌리기 수법은 터지게 되어 있기 마련이고, 2007-2008년 미경제대란이 그 예인 것이다. (어쩌면, 한국의 경우, 부동산 버블과 함께 떠지면 대란이 일어나지 않을까 생각든다.)
미경제대란처럼 결국은 나라가 대규모의 buy out을 실시하게 되고, 이런 돈이 금용업계로 들어가면, 그들은 그 돈으로 자신들의 월급 올리고, 직원들 보너스 주고 말 그대로 돈의 파티를 열게된다.

어쩌면, 10년 뒤, 미국경제대란과 똑같은 모양의 경제대란이 한국에서도 일어난다면, 지금 미국시민들이 그러는 것처럼 한국국민들도 엄청난 불황에 허덕이게 되지 않을까? 그러는 동안, 지금 미국의 월가가 미국시민들의 부를 훔쳤듯, 그때에는 아마도 한국의 부를 미국의 거대자본회사들이 훔칠 것이고, 미국정부는 세금을 걷으면서 희희낙낙할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엄청난 이익의 대부분은 미국 자본회사들과 몇몇의 한국 대기업들에 돌아가는 것은 아닐까 걱정이 된다.

솔직히, 비금융인으로 이 모델이 실현가능한 모델인지 어떤지는 모르겠으나, 미국에서 이미 규제철폐가 어떤 결과를 불러 일으켰는지 잘 알고 있고 심지어 영화로 까지 만들었는데, 다른 나라에 까지 전파하는 이유는 너무 뻔하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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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가지 꿈을 따라간 15년 인생살이

say something 2011/11/14 07:55
96년 대학을 학사로 졸업할 때, 다른 사람들은 한참 사진을 찍고, 아는 사람들과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있을 즈음, 똑같이 행복했어야 할 나는 그러지 못했다. 마침 어렵게 회사에, 그것도 당시에 대기업이라고 속하는 회사에 들어갈 수 있게 되었음에도 나의 마음 한구속은 한참 검은 먹구름으로 뒤덮혀 있었으며, 당시 어머니의 애원에 겨우 한, 두장 사진만 찍고 졸업장을 빠져 나왔다. 대학을 입학하자마자 갑자기 가정형편이 어려워 졌고, 급기야 대학교 3학년때 아버님이 돌아가셔서, 집안은 겨우 친지들 도움으로 방한켠과 나의 졸업때까지의 등록금만 남았었다. 고등학교때까지 부족함 없이 철부지로 자라서 그런지, 그런 환경속에서도 마침 대학교 4학년에 되서야 학업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경제사정때문에 대학원을 가지 못하게 된것이 못 내 아쉬웠다. 치기 어린 마음에서 일까? 결국 현실에 굴복하게 되었을때 오기로 라도 세가지는 꼭 해보자란 생각이 들었고, 어쩌면 어려운 현실에 대한 부정이었을지도 모르겠다.

대학교를 졸업할때 나의 세가지 꿈은,
첫째, 해외여행을 많이 해보는 것 - 대학다닐때 일본을 여행해 보는게 꿈이었고, 고등학교때 시절부터 일본 배낭여행에 대한 세미나 (당시, 이규형의 배낭여행이란 제목으로 부산에서 세미나 같은 것 했었는데, 그때 그 이야기를 듣고, 대학만 가면, 바로 일본으로 여행을 할 수 있게 될 줄 알았다.)
둘째, 무조건 대학원을 졸업하기.
세째, 해외에서 살아 보기. (뭐 누구나 막연히 이런 꿈을 가질 수 있으나, 나의 경우는 초 중 고등학교 때마다 매년 부모님이 미국으로 이민 갈 것 같은 이야기를 자주 하셔서, 그걸 해보지 못한 것에 대한 아쉬움에 생긴 꿈이 아닐까 생각한다. 실제로, 미국에 많은 친척분들이 계시고, 어쩌면 기회가 되면, 미국 이민을 갈 계획도 있었으나, 매번 그 계획은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첫번째 꿈은 그리 어렵지 않게 해결 되었다. 직장 생활을 시작하자, 학생때와는 다르게 경제적 여유가 생겼고, 나는 기회가 될때마다, 일본, 홍콩, 마카오, 라오스, 캄보디아, 태국, 싱가폴 등등을 전전하며 여름휴가를 보냈다. 처음 홍콩을 여행한다고 했을때가 98년이었는데, 직장내 다른 사람들은 이해를 하지 못했다. 왜 출장이 아닌 다른 이유로 해외로 나가려 하는지, 아마 해외여행이란 아직 그렇게 익숙하지 않았을때 여서 더욱 그랬던것 같다. 그렇게 '앙코르 왓'과 '보르부드르 사원'등을 내 눈으로 보고 느꼈을때, 나는 여행이란 나의 꿈에 만취되어 있었다.

두번째 꿈은 몇가지 시도와 타협이 있었다. 첫 직장을 3년 8개월 정도 하고 났을때, 나는 다시 학교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큰 돈은 아니지만 이리저리 저축한 것을 더하면, 어찌저찌하면 2년 공부를 할 동안 먹고 살 정도 되는 것 같았다. 그래서 몇군데의 대학원에 지원도 하고, 때마침, 한국항공우주산업에서 전문 계약직 엔지니어를 모집하길래, 그쪽에도 지원을 했었다. 나의 학부는 항공우주공학으로 한국항공우주산업에 입사하면 항공엔지니어로의 커리어를 시작하기에도 좋을 것 같았다. 우여곡절 끝에 마침내 가장 일찍 연락이 온 항공우주산업으로 이직을 하고, 항공 엔지니어로의 경험을 쌓기 시작하였다.
첫 직장은 대우정밀 이라는 대우계열사 였고, 항공우주산업은 삼성에서 마침 떨어져 나온 삼성계 회사였으니, 그래도 우리나라에 이름있는 회사를 두군데를 다녔었는데, 개인적으로 참 실망을 많이 한 것 같다. 물론, 일반적으로 급여나 복지 측면에서는 평균보다 훨씬 우위에 있는 두 회사였지만, 내가 생각하는 기업문화하고는 많이 달랐고, 외국에 기업문화는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였다. 이런저런 생각중에 혹시나 유학이 어떨까 고민하고 있을때쯤, 아는 친구로 부터 캐나다 이민에 대한 정보를 알기 시작했고, 부족한 유학경비대신 이민자로 캐나다를 가는 것이 많은 메리트가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들어 여러가지 정보를 모았다. 한국에 계실 모친이 걱정이 되기는 했으나, 아직 결혼도 하지 않은 지금 이런 모험을 하지 않으면, 다시 기회가 없을 것 같아, 캐나다로 이만할 계획을 세웠고, 이로써 세번째 꿈까지 이룰 수 있었다.

결국, 04년 겨울, 나는 캐나다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결정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대학원 서류는 여러 캐나다 대학에 이미 제출해 놓았으나, 지원만 하고, 일단 나는 캐나다에 가서 살 예정이니 캐나다로 갔다. 거기서 몇개월 있으면서, 영어공부도 하고, 캐나다의 컬리지나 여러가지 가능성을 알아 보고 있었다. 다행히, 캐나다의 한 대학원에서 연락이 와서, 입학하게 되었고, 그리하여 두번째와 세번째 꿈은 이루어 졌다. 캐나다에 이민자로 살면서 학교에서 대학원 석사 공부를 시작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07년 가을 나는 캐나다의 칼튼대학원에서 석사로 졸업을 하는 동시에... 백수가 되었다. ㅠㅠ. 당시, 나는 내가 세웠던 세가지 꿈들이 다 성취되었음에 만족함에도, 다시 한국으로 돌아가 취업을 하기에는 내가 이미 캐나다에 투자한 시간이, 노력이 혹시나 캐나다에서 일자리를 얻는데 도약대가 되지 않을까 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기왕 여기까지 온거 외국의 회사에서 일한 경력을 만드는 것이 보너스 꿈이 되어 버렸다. 실은, 처음부터 나의 생각은 외국의 기업에 엔지니어로 일하는 것일지도 모르겟다. 위의 세가지 꿈은 결국 마지막 보너스 꿈을 실현하기 위한 과정이었다. 그렇게 미친듯 여름휴가때마다 혼자 해외를 쏘다녔던 건, 외국의 어려운 환경에 있을때를 대비한 훈련이 아니었을까? 두번째, 세번째꿈은 해외취업을 위한 선수과정이나 마찬가지 였던것 같다.

그리하여, 1년여년의 취업을 향한 노력은 08년 캐나다의 한 조그만 항공회사에 취직이 되면서 이룰수 있었다. 그리고, 11년, 그 회사에서 레이오프 됨과 거의 동시에 Bombardier Aerospace 라는 Boeing과 Airbus에 이어 세계 항공기 생산회사 3위의 회사에 입사하면서, 나의 15년 꿈의 인생은 안착할 수 있었다.

요즘엔 많은 사람들이 현실을 직시하라고 말한다. 물론,아주 공감하는 말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꿈까지 버릴 필요는 없을 것 같다. 내가 꿈을 버리고, 현실만 바라봤다면, 취업때 양복한벌 없어서 친구한테 빌려 입었던 사람이, 세계 3대 항공회사의 엔지니어는 될 수 없었을 것 같다. 나는 내가 특별히 공부를 잘하다건가, 훌륭한 엔지니어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단지, 내가 있는 자리에서, 무엇이 항상 최선이고, 내가 어떤 선택을 할 수 있는지를 늘 고민했던 것 같다.

현재의 나는, 아직도, 내일 어떻게 될 지 모르는 한사람의 엔지니어일 뿐이지만, 자신의 꿈은 자신의 힘과 노력에 의해 성취된다고 믿는 많은 사람들 중에 하나이다. 심지어 입에 금수저를 물고 태어난 사람이 비웃을 지라도.. So what, I don't ca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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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reless Camera(WVC80N)로 꾸며보는 베이비 모니터

gadget 2011/10/25 11:59
예전에 미국에 있는 누나를 만나러 갔었는데, 그때 막내조카가 아주 어릴때 였었죠. 그때 누나가 하는 말이 베이비 모니터가 있어서 너무 편하다고 하더군요. 아마 가끔씩 미국영화나 드라마 같은데 보면 나오는데, 아기옆에 마이크를 설치하고, 거기서 들려오는 소리를 부엌이나 거실에서 스피커를 통해 듣는 방법이죠. 이제 아주 편리한게, 미국이나 캐나다 같은 경우, 대부분의 집의 구조가 1층은 거실, 키친, 2층에 주로 거주하는 방들로 구성되어 있죠. 따라서, 2층에 아이를 잠시 놔 두고, 1층의 부엌에서 무언가를 하기가 상당히 어렵습니다. 무슨 일이 일어날 줄 모르니깐요,
그렇다고, 자는 아이를 매번 부엌으로 들고 내려오기도 애매하죠. 시끄러워서 애가 깨는 것도 있거니와, 아이를 들고 1층 2층을 왔다갔다 하는 것도 큰 문제죠.
얼마전에 저희도 아이가 생겨서, 어떻게 할까 고민을 했죠. 사실 저희 집은 지금 일반 콘도에 있기 때문에, 꼭 베이비 모니터가 필요없다고 할 수 있지만, 그래도, 잠시라도 딴일을 할때 아이가 잘 못 될까봐 은근히 걱정이 되더군요.
그래서, 여기 저기 알아 봤는데, 소리만 들리는 베이비 모니터의 경우는 가격이 50불에서 100불 사이인 반면에 화면을 볼수 있는 것은 거의 200불이 넘더군요.
어떻게 할까 고민을 하다, 생각해 본게 Wireless Camera를 사용해 보는게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요즘에 개인용 security camera로 사람들이 많이 사용하게 되면서 가격이 많이 떨어진것 같더군요.
그래서, 인터넷을 통해서 링크시스 Wireless-N internet home monitoring Camera (WVC80N)을 사서 사용하게 되었습니다.
http://www.linksysbycisco.com/LATAM/en/products/WVC80N

가격은 130불 정도 했던것 같구요, 장점은 640X480해상도까지 지원되고, 광량이 적은 곳에서도 잘 작동되고, 설치가 쉽더군요. 단점은 마이크로폰이 노이즈가 너무 심해서 사실 사용 불가능이고, 그것도 MS-Explorer에서만 작동이 됩니다. 요즘에 비슷한 성능에 더 싸고, 마이크로폰이 없는 것도 있으니, 그쪽도 괜찮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실제 사용해 보니, 특별한 프로그램을 설치할 필요도 없고, 인터넷 웹브라우저에서 주소면 치면, 내장 프로그램이 작동하여 같은 네트워크에 있는 PC내에서는 바로 아이의 모습을 볼 수 있고, 저 같은 경우는 집에 맥미니를 TV랑 연결해 놓았는데, 바로 사파리를 통해서 큰 TV로 볼 수 있으니 좋더군요. 그리고, ASUS eee pad transformer (허니컴)에서도 카메라 관련 어플을 이용하시면 바로 볼 수 있습니다. 저 같은 경우는 셋업에 문제가 있어서 사용해 보지는 않았지만, 외부DNS서비스를 사용하면, 외부PC 및 휴대폰에서도 사용 가능하다고 하는 군요. 언제 어디서나 새로 태어난 아이를 보고 싶으신 분은 한번 시도해 보시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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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나다에서의 iphone 4S

gadget 2011/10/21 11:48

캐나다만 그런건지, 로저스라서 그런건지, 가격이 199인데 Mail-in rebate로 50불을 신청하면 다음 Bill에서 깍아 준다고 하네요(결국 149불). 2년 6개월 이하는 30불 패널티 내야 하구요. 택스등 이것저것 다해서 300불이 조금 넘더군요. 당연히, 3년 컨트랙이구요. (캐나다 니까요..ㅎㅎㅎ).

 

씨리도 잠깐 써 봤는데, Map and direction은 미국만 되더군요. "Where am I" 하면, 자기는 캐나다 맵을 불러올 수 없다. 뭐 이런 내용만 나오네요. 제가 발음이 안좋은지 인식률은 그리 높지 않더군요. ㅠㅠ (그래도 개인적인 생각으로 이정도는 되야지 하는 것 보다는 훨씬 잘 되는 것 같습니다.)

 

업데이트는 restore itune 뭐라고 써 있는거 누르니깐 자동으로 되고, 받자 마자 바로 개통되고, 전에 쓰던 폰은 바로 Deactivate 되더군요.

 

근데 핵심은 '와이프 꺼라는' ㅠㅠ  그동안 3G로 인내심을 시험하더니.. 아이폰 노래를 부르더군요.

화이트인데 생각보다 보기는 괜찮더군요. 액정이 약간 노랗다고 하는 경우도 있던데, 제가 보기엔 잘 모르겠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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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직장(회사) 란?

say something 2011/10/12 11:45
갑자기 좋은 직장이란 어떤 정의를 가지고 있을까? 란 궁금증이 들었다. 물론, 돈을 많이 주는 회사가 좋은 회사일수도 있지만, 절대적인 기준이 되는 건 아닐거란 생각이 든다. 얼마전에 회사에서 같은 팀원이 자기 생일이라고 하길래 몇살이냐고 물었더니, 23살이란다. 사실 많이 놀랐다. 얼마전에 여러 엔지니어들 앞에서 자기가 맡은 일 프리젠테이션도 하고 하길래, 그래도 경력도 좀 많이 있는 친구일 줄 알았는데...

같은 팀원들 중에 23, 25살 된 친구들이 몇명 있다. 또한, 얼핏 보기에도 50이 넘은 엔지니어들도 많다. 우리 팀이 20-30명인데 나이도 들쭉날쭉이고, 200명 정도 되는 우리 부서를 봤을때도 참 다양한 연령대의 사람들이 일하는 것 같다.

사뭇, 한국의 직장 분위기와 참 많이 다른것 같다. 한국의 경우, 우수한 젊은 인력이 많은 다양한 아이디어롤 표출하려 해도, 나이가 적다는 이유만으로 의견이 무시되는 경우가 많았던 것 같다. 물론, 엔지니어링의 경우, 어느 정도 경험도 있어야 하고, 실수도 많이 해봐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러한 제한들이 일을 제대로 못하게 되는 기준이 되지는 않는다. 그래서, 경험 많은 Senior engineer들이 팀 전체를 리드하고, 어려운 사항들이 있을때 항상 거리낌 없이 물어보고, 설명해 주고 그러는 걸 봤을때 참 솔직하게 일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한국의 경우도 그러한 분들도 많았지만, 어떤 분은 자기가 가진 노하우가 무슨 자기 밥그릇인양, 남에게 절대 알려주지 않으려고 그러는 분들 또한 적지 않았던 것 같다. 캐나다로 그런 사람들이 있겠지만, 그렇게 유별난 사람들은 적게 보이는 것 같았다.

좋은 직장이란
1) 연공서열보다는 나이에 관계없이 수평적인 관계가 지속될 수 있는 팀원
2) 각 분야가 전문화 되어 있어서, 자신만의 업무에 집중할 수 있는 조직
3) 각 개인이 희생이 되어야 하는게 아니라, 자발적으로 일에 몰두 할수 있는 환경
4) 직원의 미래에 관심을 가져주는 회사

등등이 아닐까 하는 개인적인 생각이 들었다.

사람마다 다 기준이 다르기 때문에, 반드시 어떤 요소가 중요한지는 개인의 판단에 의해서 달라질 것이다.
단지, 내가 경험하기에 저런 조건들이 충족되는 회사라면 어느한 사람이 가서 일하더라도 좀더 의욕적, 창조적으로 일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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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꼭 "스펙"이란 단어를 사람에게 쎠야 할까?

say something 2011/10/06 10:46
오늘 자주가는 커뮤니티에 "스펙"이란 단어가 반복적으로 많이 나오길래 아쉬운 마음에 글을 적는다. 스펙.. SPEC 는 specification (사양)이란 의미로 쓰이며 주로 하드웨어의 성능비교를 위하여 사용되는데, 오랜 테스트 엔지니어로 때로는 spec을 만들어 제출하는 경우도 있고, 또 어떤 때는 맞는 스펙에 관한 장비를 써치하여 구매한 적도 여러번이다.

오늘날 한국에서는 약간 다른 의미로 사용되는 듯하다. 어떤 사람의 학점, 언어실력 및 자격증, 유학경력등을 통털어 일컫는 말로, 예전에 어딘가에서 "네 스펙에 잠이 오냐?"란 말을 듯고 "풋"하고 웃으며 참 누가 저런 구절을 만들어 냈는지 참 대단하다 라고 웃으며 넘겼던 기억이 난다.

이제는 아예 신문기사는 물론이고 일상용어가 된 "스펙". 언제부턴가 식상하고 '어떻게 기계에나 붙이는 단어를 사람에게 쓰게 되었을까'하는 의구심이 가시질 않는다.

어쩌면, 나에게는 이런 '스펙'을 사람에게 쓰는게 요즘은 아니고, 한 참 전으로 거슬러 올라 가는 것 같다. 한 10여년 전이었나? 당시, 해외유학에 관심이 있던 터라, 여기저기 유학관련 커뮤니티를 두루 섭렵하고 있을때 쯤, '저는 이번에 보스턴 대학에 입학하게 된 아무개입니다. 저의 스펙은 xxxx' 이라고 하며, 자신의 학점과, 토플, GRE점수를 공개하던 사람들이 있었다. 수백개의 대학이 있는 미국의 대학지원에서 무한정 지원할 수 없으니, 저런 가이드라인이 있으면, 자신이 지원할 학교수준을 대충 책정할 수 있어서 정말 고마운 정보가 아닐 수 없었다. 스펙을 공개하는 분들도 자신도 필요할때 저런 스펙을 보고 많은 힘들 얻었기에, 누군가에게 약간 이라도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어서 공개했을 거란 생각이 든다. 이때의 스펙이 지금의 한국에서 일컫는 스펙으로 진화했는지는 잘 모로겠으나, 아주 무관하지는 않을 듯 싶다.

어떤 사람은 이런 방법으로 정형화, 표준화하여 구분하는게 더 편리하다는 논리를 내 세울수도 있을것 같다. 하지만, 우리는 사람이고, 어느 두사람도 똑같지 않다. 그럼에도 이런 획일적인 구분이 필요한 것 일까? 부모 잘 만나서 자가용 끌고 등하교하며 여유있게 공부해서 받은 3.0이란 학점이, 매일 아르바이트에 방학때는 공장가서 힘겹게 일하며 3.0을 받고 졸업한 사람과 같은 똑같이 구분되어야 하는가? 취업이 안되서 대학원 간 사람과 정말 공부가 하고 싶어서 10년간 자신이 모은 돈으로 겨우겨우 대학원 공부를 마친 사람은 같은 석사라는 학위로만 인정되는 것일까? 해외 나와서 한국 술집만 돌아 다니는 유학생과 눈물 콧물 흘리며 밤새며 공부했던 유학생은 그냥 유학생이란 타이틀외엔 차이가 없는 것일까?

이제 제발 시대가 어떻고, 사회가 저떻고 하며 핑계대는 일은 그만했으면 한다. 20년 전에도 똑같이 그랬고, 10년 전에도 늘 같은 상황인데, 늘 자신의 책임은 없고 바깥으로 책임을 넘기기만 하려 한다.

요즘은 꿈꾸는 젋은 사람들이 참 드문것 같다. 그냥 대충 공무원이나 해서 살지 뭐. 하긴 20년 전에도 '짧고 굵게' 보다는 '가늘고 오래'가 더 선호되었으니 안정적인 삶을 추구하는 것은 어느 시대나 마찬가지인 모양이다. 그렇다고, 자신이 가신 꿈 마저 날려버릴 필요는 없지 않을까? 꿈 꾸고, 그 꿈을 어떻게 하나 둘 실천해 나아가는냐 하는 것이 자신이 얼마나 알찬 삶을 꾸려나가느냐의 바로메터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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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마흔, 삶의 정점에서...

say something 2011/09/21 12:48
한국 나이론 이제 마흔, 여기 나이론 좀 남긴 했지만... 하여간, 오늘 문득 생각난 김에 늦은 시간이라도 까먹기 전에 남긴다. 오늘 아침 문득 지금이 나의 삶의 정점이 아닐까 란 생각이 들었다. 이것만은 꼭 하고 싶다고 작정한 3가지가 1) 대학원 2) 해외에 살아보기 3) 해외여행하기 였다. 어느덧 3가지가 나 나름대로 만족할만큼 충족되었고, 거기다 덤으로 정말 다니고 싶은 해외의 유명 항공회사에 석달전부터 다니게 되었다.
그리고, 이것저것 하느라 한참이나 늦어졌지만, 와이프도 얻고, 얼마전에는 첫 딸의 출산으로 남들 다하는 것들 마저 다 하게 되는것 같다.
돌이켜보면, 참 긴 시간인것 같다. 남들이 한창때라고 말하는 서른 중반에 캐나다로 넘어와 늦깍이 대학원생에, 졸업하자 거의 1년간 취업시장만 바라 보고 있을때는, 여기까지가 나의 한계인가 하는 생각도 많이 들었다. 정말, 마지막이라고 생각하는 순간에, 조그마한 항공업체에 취직하게 되었고, 두 해가 지나며, 발전가능성이 낮아 보일때, 내가 이것 때문에 그 고생을 하며 지나온 건가 하는 자괴감도 들었다. 마지막에 레이오프라는 통보를 받은 후, 이제 어찌해야 하나 하는 고민과 절망의 순간에, 지금 다니는 회사에 연락이 왔고, 30분 정도의 전화인터뷰 후, 가능성이 별루 없을 거라고 생각했음에도 불구하고, 오퍼를 받을 수 있었다.

19살에 나는 항공업이 앞으로 크게 성장할거란 막연한 기대감으로 전공을 선택하게 되었고, 그 선택이 틀리지 않았음을 증명하기 위해, 나머지 20년을 살아온것 같은 느낌이 든다. 한국의 항공시장은 너무 좁고, 세계적인 항공시장에 서고 싶었던 작은 바램은, 캐나다로의 이민을 선택하게 되었고, 수많은 밤과 낮 동안 고민하고 준비하며, 한번도 발 붙여 본적 없는 캐나다 땅을 2004년 12월 어느 추운 겨울날 무작정 날아왔다. 그로부터 7년을 대학원을 다니고, 취업준비하고, 약 3년간 작은 회사에 근무하다가, 지금에야 내가 가장 원했던 회사에 원하던 일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어쩌면, 한국의 항공회사(KAI)의 5년 경력과 자동차(대우정밀)의 3년 경력도 도움이 많이 되었으리라 생각이 든다. 어쩌면 한국에서의 대기업에 대한 실망감이 나의 터닝 포인트가 되었을 지도 모른다. 또한, 나를 내다 던질수 있었던 것은 한국에 남겨둘 미련이 적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어쩌면 부양가족에 대한 부담이 적은 이때가 마지막이라 생각했기에 무모하게 도전할 수 있었던 것 같다.

누구에게나 고난에 두려움은 같다. 내가 늘 벼랑 끝에 내 몰렸을때 너무나 두려웠고, 마치 결코 이 고난을 이겨내지 못 할것 같았다. 하지만, 이 고난을 지나칠때마다 나는 조금더 많이 성숙해 지고 강해지는 것 같았다. 지금은 좋은 직장에 있지만 어느 순간 어떻게 될지 모르니 불안하긴 마찬가지이나, 그 동안 많은 고난에 내성이 생겼는지, 이제는 뭐 어떻게든 되겠지란 배짱이 약간 생긴것 같다. 사람들은 힘들것 같은 고난에 너무 과대포장해서 두려워하는 것 같다. 아마, 격어보지 못해서 더욱 그런 두려움이 큰 것 같다. 특히, 젊은층이 더 심한것 같다.

어느 누구도 고난과 현재 자신의 고민과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에 즐거워하는 사람은 없다. 고통스럽고, 어서 이런 역경이 끝나기만을 바라지만, 어느 순간, 뒤돌아 보면, 내가 살아온 삶을 가치있게 만들어 준 것들이 이런 역경과 고난 속에서 자라났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tags : 마흔, , 정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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